아버지 이삭은 나이 40에 결혼(25:20)했다. 그들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부부였다. 이삭은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했고(21v)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나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비록 복중에서부터 싸우기 시작한 말썽꾸러기들이었지만 20년간의 기다림과 기도 끝에 생긴 귀한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두 아들을 각각 하나씩 편애했다.
이유 :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28v). 반면 리브가의 야곱 편애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음(몇 가지 추측은 가능. 외향적인 첫째보다 조용한 둘째를 더욱 사랑했다던지, 아니면 단순히 사랑받지 못하는 차남을 배려하다보니 또 다른 편애가 되었다던지... 아무튼 추측)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 야곱(27v). 그의 내면에는 틀림없이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상처(?) 조용한 성격이 긍정적으로 개발되어 온유함과 깊이를 갖춘 인격자가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야곱의 발달 방향은 치밀한 계산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능숙한 쪽으로 향했다.
한편 27장에서 리브가가 야곱을 위해 계책을 쓰는 것과 29장에서 외삼촌 라반이 결혼식에 술수 부리는 것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는 외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부계, 즉 아브라함 가문의 남자들은 좀 흐리멍텅하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어딘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가며(말이 좋아 믿음의 조상 ㅋ), 사막 지대에서 목숨과도 같은 우물을 놓고 분쟁이 일어나면 매번 양보하고 선선히 물러섰다. 결정적으로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자기 살려고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말한 것이 똑같았다. 야곱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버지 이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다분히 부정적이었으리라.
어쩌면 속이는 자, 교활한 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야곱의 모습은 자신을 편애한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야곱은 팥죽으로 형 에서가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샀었다. 27:36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속여서 빼앗은 것에 격분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실재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삭은 팥죽으로 이루어진 거래를 무산시키려 했다. 에서를 불러서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그것을 먹고 내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100살 이상이었다. 마흔에 결혼해서 환갑에 쌍둥이를 낳았고, 에서가 사십세에 결혼했으니... 결혼 직후의 이야기라고 해도 100세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27:1) 아버지를 대신해 장자의 명분을 갖고 가문의 기업을 맡아 관리했을 야곱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형을 편애하고 있었다.
결국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이는 일을 시작했다. 형이 사냥에서 돌아오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야곱은 염소 새끼의 털 가죽을 몸에 감고 어머니가 염소를 요리한 요리를 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술수에 능한 리브가와 야곱의 연합작전을 흐릿한 아브라함 가문의 남자가 당해낼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삭은 연로해서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그는 목소리와 피부의 감촉이 불일치하는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27:22-23) 그 이상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큰 아들을 편애했었던(25:28) 그가 염소로 만든 요리를 사냥해온 것으로 오해했다(27:25). 지각과 미각이 흐릿한 상태였던 것이다.
아버지를 속여 축복 기도 받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했다. 명분은 결혼할 처자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분노한 형에게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의 축복 기도까지 받았으니... 두 가지를 모두 차지하였으니 잘 풀려야만 했는데 그의 현실은 도망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던 야곱. 형이 되고 싶었으나 차남으로 태어났던 야곱.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형을 더욱 사랑했다. 장자권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형을 축복하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여 축복 받았지만 집안에 그가 머물 곳은 없었다. 그는 형을 피해 집을 떠나야만 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될 때, 이젠 더 이상 아버지의 자비를 기대해볼 수도 없을 것만 같은 절대절망과 절대고독의 시기에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벧엘의 꿈, 하늘과 땅의 만남이 환상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의 말씀(28:13-15)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야곱에게 너는 내게 아브라함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를 상실한 듯한, 뿌리를 잃은 듯한 쇼크 속의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벧엘에서 만난 여호와의 기억은 그의 일평생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여전히 권모술수로 점철된 생을 살아가며 이익도 얻고 손해도 보면서 비틀비틀 지냈지만 그가 다시 돌아가기를 결정한 곳은 벧엘이었다(35장). 훗날 에서와 화해하고도 야곱은 바로 아버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33:18). 34장에서 딸 디나가 강간 당하는 슬픈 일을 겪은 후에야 그는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이 벧엘임을 깨닫고 가정을 정결히 정돈한 후 벧엘로 돌아갔다(35장). 그 후에야 비로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찾아갔다(35:27-29).
야곱의 응어리 진 가슴을 풀어주신 분, 아비에 대한 원망이 삶을 추동하던 것에서 벗어나 ‘나는 하나님과의 정당한 계약 당사자다. 나는 아브라함 자손이다’라는 의식을 회복시키신 분. 야곱, 즉 속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평생 달고 살았던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시는 은혜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야곱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가운데 "세속의 신전(The Capitol of the World)"이 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한 이 소설은 어느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이 아버지가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남자 800여명이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시절 남자 후배들과 고민을 이야기해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둘 중 하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나는 성(性), 또 하나는 아버지와의 갈등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것, 아버지에게 학대 받은 것... 그런 이유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참다운 아버지로 다가오셔서 아들의 일그러진 자아상을 영광스럽게 회복시키신다. 아버지 만나기를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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