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을 넘어서
- 김삼 목사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1. 김삼 목사님의 글(원문보기)을 읽고도 즉시 답변을 작성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직 학업을 수행 중인 대학생이라 중간고사 기간에는 글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2. 제가 처음 작성했던 글(원문보기)의 일부를 정정합니다.
1번 논의 중 [우리말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을 의미한다. 중언부언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관상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맞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살필 때는 국어사전만을 참고해서는 안된다. 원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주지해야 하고,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라는 단락의 일부를 수정합니다. [중언부언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관상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맞다.]가 아니라 [중언부언의 사전적 의미를 따르는 기도 형태는 ‘관상기도 상태’로 들어가는 하나의 도입부로 사용될 수 있다.]로 정정하겠습니다. 이는 ‘관상기도’가 어떤 특별한 기도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경우는 한 문장을 되풀이하는 방법(예를 들어 ‘예수 기도’) 보다는 렉시오 디비나(Letcio divina)를 통해 관상기도의 느낌을 조금 맛보았습니다(렉시오 디비나와 관상기도에 대한 기사).
3. 글을 쓰는 내내 마치 제가 대단한 영성가라도 되는 양 구는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혹여 저의 오만함에 마음 상하실 분들에게 미리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0. 애매한 태도에 대한 짧은 변명
김삼 목사님은 저의 글에 대한 느낌을 ‘애매한 입장’, ‘헷갈리는, tricky한 몸짓’, ‘말바꾸기’ 등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느끼신 가장 큰 이유는 저의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번의 글로 진의를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에 글머리를 빌어 왜 제가 그렇게 모호하게 보이는 태도를 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삼 목사님이 모두에 지적하신대로 저는 관상기도를 반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관상기도를 찬성하지도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관상기도를 대하는 저의 입장은 사항별(case by case)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 쪽입니다. 관상기도(혹은 그와 유사한 종교적 체험) 전체를 뭉뚱그려 옳으냐, 그르냐 구분하는 이분법적 도식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김삼 목사님의 견해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관상기도가 왜곡된 신비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목사님의 극단적인 태도에 딴죽을 걸게 된 것입니다.
관상기도 전체를 죄악시하는 극단적 이분법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각각의 사례별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형태라면 저 역시 관상기도 비판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계속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중언부언의 문제? 해석의 문제?
‘중언부언(바톨로게오)’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말을 더듬는 것’,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김삼 목사님이 인용하신 자료는 물론 제가 인용한 호크마 주석,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굳이 호크마 주석을 인용한 것은 제가 가진 주석 중에 이것이 유일하게 한글로 되어 있고 다른 주석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번역의 수고를 덜고자) 그랬던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텍스트 주위의 몇 절만을 참조하지 않고 문맥을 넓게 보았을까요? 그것이 단지 저의 뜻에 맞도록 텍스트를 왜곡시키려는 무익한 시도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데, 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할 때 단어 주위의 맥락을 폭넓게 고려하는 방식은 가장 탁월한 성경 해석자이신 예수님의 모델을 좇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성경 해석의 전형을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논쟁(누가복음 6장)에서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주어진 전체의 맥락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안식일에 대해서는 알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중언부언’ 한 마디도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이신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즉 맥락(context) 속에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단 성경의 세계에서만 맥락이 중요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가’라는 두 글자는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지만 제가 사는 경상도 문화권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는 “그 녀석이 네가 말한 그 녀석이냐?” 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어서 가져가!”라는 뜻이 됩니다. 전후 사정없이 ‘가가’라는 글자만 던져져 있다면 우리는 그 두 글자가 어떤 의미로 튀어나온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세계는 오죽하겠습니까? 아무리 최근에 기록된 본문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천년 이상의 시간적 단절을 가졌습니다. 해석을 위해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노력은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레엄 골즈워디는 <따라서,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적인 결론은, 만일 성경의 통일성이 정말로 의미를 지니려면 어떠한 성경 본문이든지 그 실질적인 문맥은 성경 전체가 되어야 하며, 주어진 성경 본문이 그것의 직접적인 문맥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전체적인 계획과도 연관을 가져야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34쪽)라고 말하며 문맥의 범위를 가능한 넓게 잡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만약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채 ‘중언부언’의 사전적 의미만을 해석의 준거로 삼는다면 우리는 머리 아픈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모든 종류의 발화(發話)가 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일까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으나 너무나 마음이 슬프고 답답하여 ‘주여… 주여…’ 만을 되풀이하거나, 아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한 나머지 ‘아버지… 아버지…’라고 되뇌이는 그런 사람에게도 ‘당신은 지금 중언부언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중언부언보다는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라고 불러야 옳지 않을까요? 반대로, 아무리 유창하게 얼개가 잘 갖추어진 기도를 하여도 정작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맹목적으로 토해낸다면 그것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중언부언’이 등장한 문맥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맥을 고려한 해석을 빙자해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려는 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나름으로 문맥을 고려해 해석한 ‘중언부언 기도’의 의미(하나님의 선하신 뜻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욕망만을 끊임없이 토설하는 기도)가 과연 합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참고 자료를 조사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WBC 주석은 문맥을 고려한 저의 해석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In view is the attempt to manipulate God through repetitive).
덧말1)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쓴 글에 ‘국한’(‘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중언부언의 기도는 단순히 한 문구만을 되풀이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의 의도는 ‘중언부언’의 사전적 의미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에서 제대로 해석하자는 것입니다.
덧말2)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바알,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만 외쳤다, 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기도가 전형적인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다소 극단적인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상인 교수의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고고학]에 따르면 바알 숭배자들 역시 격식을 갖춘 예전적 기도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기도는 서원을 하고 이를 실행하는 내용이며, 발견된 대부분의 서원기도 본문의 끝에는 그들의 신이 헌신자의 기도를 들었다는 전형적인 문구로 끝이 난다.’, 90쪽). 열왕기상의 본문에 그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니다. 열왕기는 바알 종교의 예전과 의식을 상세하게 전하는 데 기록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바알 종교의 상세한 의식은) 과감하게 생략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2. 절대적으로 옳은 관상기도?
홍정환 님은 “일상의 삶에서 짧은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돌보심을 고백하는 행위가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배제한 채 ‘신과 합일을 꾀하는 뉴에이지적 시도’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관상 행각에 전적으로 A-OK 점수를 주고 관상기도가 잘못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 셈이다. [그러나 글 총결론에서 이를 뒤집는다!]
누차에 걸쳐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저는 관상기도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이러한 점 때문에 ‘말 바꾸기’, ‘반관상파에게 던지는 추파’라고 제 주장을 비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위, 목사님이 저의 글에서 인용하신 부분과 결론 부분, 이렇게 단지 두 부분만을 뚝 때어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 인용문에 등장한 저의 주장은 공덕(功德) 쌓는 것을 중요시하는 동양종교의전통과 관상기도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관상기도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이라고 다 같은 반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실한 말씀 묵상과 반복을 통해 관상기도에 돌입한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입버릇처럼 ‘주여’, ‘할렐루야’를 되뇌고 요절을 암송하지만 정작 말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유사 관상기도’(김삼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상 행각’)에 대해서는 A-OK 점수를 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반복하는 기도’ 자체를 관상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관상기도’가 특별한 기도방법의 하나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 침묵기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등 기도 방법에 상관없이 - 기도하다보면 어느 사이에 돌입하게 되는 그 평온함,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벅찬 감격…… 바로 그 순간의 기도상태를 가리켜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지 따로 관상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신앙배경과 성품, 기질에 따라 개인에게 적합한 방법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저의 경우는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관상의 맛을 보게 되었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중에 관상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한 문장을 되뇌는 것이나, 마음을 다해 말씀을 묵상하는 것, 혹은 말을 멈추는 것 모두 관상으로 돌입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김영봉 목사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말을 멈추는 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입을 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오감을 모두 닫아야 한다. 육신의 모든 감각 기능을 침묵시키고, 해바라기처럼 하나님을 향하고 그 온기를 즐기라. 기도 생활이 이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경험은 결코 일부 수도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침묵으로 열리는 광활한 세계를 조금씩 탐험해 들어갈 수 있다. 그 탐험이 주는 영적 행복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침묵은 기도를 위한 준비가 아니다. 침묵은 기도를 준비시켜 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온전한 기도이기도 하다. 말 기도와 침묵 기도를 번갈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으로만 기도 시간을 전부 채울 수도 있다.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 머물러 있는 것이 침묵 기도의 정수다. 동양 전통에서 말하는 좌망(坐忘)과 유사한 상태다. 다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품에 머무른다는 점이 다르다.
높은 차원의 기도자들은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영적 조명(照明)을 받는다는 뜻이다. 말 없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문득 어떤 생각이 오롯이 떠오른다. 교회 전통에서는 이것을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고 부른다. 침묵 기도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때로 이러한 영적 조명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을 심오한 차원의 관상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일상 속의 구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의 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 경험이 좀더 자주 반복되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일 것이다.
사도바울은 침묵기도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 김영봉, [사귐의 기도], 140-141쪽, IVP
아마도 목사님께서는 저의 글을 보시면서 여전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관상기도가 그렇게 좋아? 그렇다면 왜 성경은 그 좋은 관상기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거야?’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은 관상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였을 때 침묵한 채 하나님만을 응시했던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김영봉 목사의 글을 조금 더 인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위엄과 진리와 사랑을 깨달으면 할 말을 잃어버리는 침묵에 이른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그저 놀라고 감격할 뿐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처음으로 경험하면 자신의 죄성 때문에 말이 막히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그분의 위엄 때문에 말이 막힌다. 어렵게 짜내어 말해보고는 그 말이 공허하고 어색하다는 것을 느끼고 금방 포기하게 된다.
(중략)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주어진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단어 가운데 어떤 단어도 그 느낌에 어울리지 않았다. 단어들이 모두 빈껍데기처럼 느껴졌다. 말문이 막혔다.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한다. 나의 모든 열망이 그분의 섭리 안에 있고 나의 모든 희망이 이미 그분 안에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 자신의 존재가 충만하게 실현되었음을 확인한다. 하나님 안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진 자신의 미래를 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자신의 모든 말이 이루어져 있음을 보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다.
- 김영봉, [사귐의 기도], 143-145쪽, IVP
덧말1) ‘방언기도는 프뉴마(pneuma:영)차원의 기도, 관상기도는 프쉬케(psyche:혼)차원의 기도’ 라고 분류하시며 그 근거로 ‘목사님께 주신 성령님의 슬기’를 언급하시는 부분에서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반하고 있는 주장인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프뉴마와 프쉬케의 차원을 구분하시는 것을 보니 영-혼-육 삼분설을 전제하신 발언인 것 같은데 과연 성경은 삼분설을 지지하고 있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참고글).
덧말2) ‘그렇다면 지금 현재 구체적으로 카톨릭/신교(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뉴에이지적 종교다원주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인가, 모른 체 하겠다는 것인가, 알아도 무시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제가 뉴에이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제 입장에서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포스트 모던 시대에 나타나는 다양한 양태를 개별 사례로 취급해서 분석하지 않고 ‘뉴에이지’라는 용어로 손쉽게 범주화 해버리는 것은 성급한 태도라는 말 뿐입니다.
3. 한결 같으나 날로 새로우신 하나님
그는 '골'을 통감하는 원인을 설명하면서..하나님이 날로 새로우신 분이시라고 주장한다. [틀렸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지, 날로 새롭게/수시로 바뀌는 분이 아니시다. 어제나 오늘, 영원히 한결 같은 분이시다!] 또 묵상하면 할수록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뵙게 된다고, 익숙한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새롭게 바뀌는) 하나님을 뵙게 되고,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관 컨셉트의 여지없는 오착이다. 전혀 새롭다니 하나님의 성품이 어제와는 100%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 변덕스런 인간과 다름 없이 맨날 바뀌신다는 뜻이 아니련가.
‘하나님은 날로 새로우신 분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뵙게 되고, 깊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익숙한 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된다.’라는 문구가 이 정도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에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컨셉이 변하다니요. 제 글이 그렇게 읽힐 수 있단 말입니까?
목사님이 이미 지적하셨듯이 제가 ‘하나님은 날로 새로우신 분’이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간의 인식체계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접할 때마다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을 받지 않습니까?
언제나 자상하고 포근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회초리를 드는 순간, 유치원도 못간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새로움에 놀라지 않을까요? 잘못했을 때는 늘 엄격하게 매질하셨지만 아들이 잠든 줄 알고 몰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손길을 경험하였을 때 사춘기 소년은 아버지의 새로움에 감격하지 않을까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마냥 수퍼맨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그분의 어깨가 감당키 힘든 삶의 무게로 짓눌려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눈물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한결 같으나, 부모님의 내면을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조금씩 더 알아가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을 대하는 것 같은 경험이 없으신가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진대, 하나님을 밝히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평생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하기로, 주님 뵈올 그 날에 온전히 알기를 바랄 뿐입니다. 목사님은 이러한 경험을 ‘거듭난 영(spirit)에 속한 혼(soul)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선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실지 모르나, 애당초 그 주장 자체가 -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 삼분설에 기초하고 있을 뿐입니다.
덧말1) 이어서 그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하는" 존재로 풀이하곤, 성경을 통해 계시해주신 그분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 지속적으로 알아가고 만나야만 하는가 라고 자문한다. 그리곤, 기본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인식체계와 감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답한다.
문제는 성경을 통한 계시, 다시 말해 문자로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의 속성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경험, 즉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요한복음 14:26). 관상의 상태는 성령님과의 소통입니다.
덧말2) 거듭난 성도는 죄인이었다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 뵙고 그 영(성령)을 자기 속에 모신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 분과 친교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친교를 잘 하지 않는 데 있지, 대상을 못 찾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관상기도 같은 구도적 영성은 비신자들에게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옳습니다! 우리에겐 친교가 필요합니다. 관상은 친교입니다. 교제이며 교통이고 사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구도적 영성이 필요불가결하냐구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반복해 기도함으로,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말씀의 중층적(重層的)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새롭게 경험하는 그 과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구도(求道)라는 말 자체가 ‘만물의 이치를 찾고 묻는다.’라는 뜻이 아니었나요?
4. 맺으며
홍정환 님은 방언기도는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원시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방언기도를 평준화/일반화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일편 "성령의 역사"로서의 방언과 악령에 의해 이뤄지는 방언기도도 존재함을 간접 시인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연 그의 분별이 있는 건지, 또는 의도가 뭔지 아연해진다. 혹 그는 김삼이 말하는 방언기도는 사탄의 것, 자신이 언급하는 방언기도는 성령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혹시 제가 목사님의 주장을 사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실까봐 두렵습니다. 또 아직도 저의 입장이 목사님께 애매하게 보일 거 같아서 두렵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방언기도를 사탄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아멘넷에 개재된 목사님의 칼럼을 읽으면서 목사님을 추동(推動)하는 힘이 진리를 향한 열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 한 편으로 감복하는 바도 적지 않았습니다. 방언기도를 평준화/일반화(?)한 것은 목사님의 이전 글에서 방언기도와 관상기도를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은 반작용으로 ‘방언기도에도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뜻을 담았을 뿐이었습니다.
여전히 애매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저의 태도는 여일합니다. 이분법적 방법 대신 사항별로(case by case) 보기를 원합니다. 분명 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관상행각을 벌이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눌한 글로 심기 불편하게 해드린 것 사죄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2007. 4. 29. SUN




덧글
브릿슬콘파인 2007/04/29 11:39 # 답글
길벗님이 사죄하실 것 까지는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반론을 제기한 것일 뿐이니 말이죠. 어쨋든,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기도에 있어서 방언기도가 좋다, 관상기도가 좋다. 이것을 논한다는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언기도만 놓고 보더라도 요새 외식화 되어 있습니다. 방언을 받은 사람은 방언기도를 못하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게 만연되어 있으니깐요. 어쩌면 관상기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일한 모습을 취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라는 게 길벗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참, 대학생이시라고 밝혔는데, 놀랍습니다. 모쪼록 더 균형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길벗 2007/04/30 13:15 # 답글
부끄럽네요.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여호수아 2009/05/27 09:03 # 삭제 답글
우앗...덧글이 사라졌네요.
이여호수아 2009/05/27 09:18 # 삭제 답글
ㅠㅠ 분명 덧글 올리기를 한 것 같았는데...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형제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은사와 축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돋보이는 글재주와 논리력은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으신 것을 확증하는 단편일 뿐입니다.
다만, 형제님께서 원글중에 김영봉 목사께서 다루신 하나님의 성품이 날마다 새로웁고...묵상 중에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는 내용에 대한 반박을 하셨는데 반박의 내용이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이 없으신 것과 하나님 컨셉이 변한다는 것은 오류라고 하셨지요.
저는 원글을 쓰신 목사님과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제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경험을 김목사께서 하신 것 같아서 덧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김목사와 제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일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목사의 글을 저는 이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 한마디로 말한다면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광대하심을 수년간 묵상하게 되었었는데, 점차 깨달아가게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뿐더러, 오늘 경험한 하나님의 어떠한 부분을 표현해봤자 내일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은 또 다른 새로운 부분을 가지고 계셨기에 정말 새로운 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연애를 해보셨을지 모르지만 연애할 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때로는 섬뜩하게 놀라기도 하죠? 왜냐하면 이런 면이 있었구나 전혀 몰랐었는데 하는 그런 상황이죠. 마찬가지죠. 하나님을 알아가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면도 있으시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을 다 알았다 할 수가 없고 그렇게 말하는게 얼마나 교만인지 알게 된게 바로 하나님의 한 성품 중에 하나이신 광대하심을 배워가면서 였다는거죠.
형제님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만, 형제님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제대로 묵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정말 끝도없이 크신 분이십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도 그 분에 대해 다 알 수가 없죠. 천국에 가서도 절대로 따분하거나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인해서요.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컨셉트가 변하는 것도 성품이 변하는 것도 아닌 절대크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자라감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길벗 2009/06/02 23:00 #
정성스런 댓글에 감사드립니다.한 가지 오해가 있어서 밝히자면...
이여호수아님의 말씀에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인데, 제 주장과 김삼 목사님의 주장을 반대로 생각하셨나봅니다. ^^;
별로 볼 것 없는 블로그지만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십시오. ^^